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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학교실 1탄- 실학이란 무엇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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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OSTV | 작성일 | 2013.10.08 | 조회수 | 1621 |
오산문화원은 9월 25일(수)부터 [테마가 있는 인문학 -실학교실] 강좌를 열었다. 이 강좌는 오산시에서 주최하고 오산문화원에서 주관했으며, 10월 30일(수)까지 총 5강에 걸쳐 진행된다. (교육비: 무료 / 교재비 1만원 / 오산문화원 : 375-7755)
이날은 "제 1강 - 정조와 다산 실학의 배경과 전개"라는 주제로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김준혁 교수가 강의를 했다. 이런 맥락에서, 실학을 제대로 알고 실천하며 살다간 정조와 다산에 대해 살펴보자.
정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기득권층의 발호(跋扈)와 폐단(弊端)으로 나라 전체가 병들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하늘이 임금을 만들고 스승을 만든 이유는 백성을 위해서 이며,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 이라고 하며 백성을 위한 정책 추진을 선언했다.
다산은 어릴때부터 다양한 학문을 접하게 되었고, "선비가 되려면 기하학, 건축학, 천문학, 병법등을 공부해야 하고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한다" 고 늘 강조하며, 몸소 실천했고, 실제로 다산이 수학박사였다는 것은 여러문헌속에 기록되어있다. 이런 학문들은 지금 시대와 달리 중인들이 하던 학문이었기에, 다산의 주장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런 두사람이 만난 것은 그야말로 운명적이었다.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유독 다산이 눈에 들어와, 나이를 물어보았는데 다산이 1762년 6월 생이라는 이야기에 정조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왜냐면 자신의 생부인 사도세자가 죽고난 20여일 후에 다산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에 정조는 속으로 다산을 여기길, 백성을 위해 올바른 군주가 될수 있도록 아버지가 보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후, 다산에 대한 정조의 신임은 대단했는데, 다산이 과거에 합격한지 불과 4개월만에 큰 일을 맡기게 되었다. 정조 자신의 최대 숙원인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는 시공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여러지역에 정약용을 암행어사로 파견하여 백성을 위한 제도가 무엇인지 늘 함께 고민했다고 한다.
정조는 왕이기에 앞서 실학을 제대로 이해한 대학자로서, 백성들의 풍요를 꿈꾸고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왕이다. 그 예로, 평등론에 입각하여 서얼의 과거차별 금지와 관직의 활발한 진출을 추진했고, 조선 사회에서 더 이상 노비제도를 존속시키지 않고자 했다. 다만, 이 정책들이 정조가 훙서(왕이나 왕족, 귀족 등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함으로써, 1801년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 소속의 노비만 혁파되는 아쉬움을 남겼다.
정조는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여, 유교와 함께 불교를 인정했고, 급기야 용주사를 지으라고 지시했다. 이것은 승유억불정책이 근본인 조선사회에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불교를 인정하는 것은 많은 신하들을 적으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불교가 이처럼 천대받은 것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다. 고려말에 승려들이 사고를 많이 쳤기 때문이다. 고려말의 승려중에 숨긴처와 숨긴아들이 없는 이가 없었다고 기록되있을 정도이다. 나라의 국사마저 고향으로 보낼정도니 그 문란함은 대단히 심했던 것이다. 급기야 정도전은 석가모니를 불씨라고 낮춰불러 <불씨잡변>이라는 책을 편찬하기도 했다.
다시, 정조와 다산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승유억불 사상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용주사를 건립한 정조의 의지는 다양한 사상을 받아들여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해야한다는 정약용의 생각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사람의 운명적 만남이 있었기에 다산의 국가개혁방안인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흠흠신서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실학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성이라고 했다. 상대방의 생각과 사상, 새로운 철학을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요새 우리는 다양성이 사라지는 사회에 살고있다. 얼마전, 교황이 낙태와 동성애를 인정한다는 발언으로 맹공격을 받았다. 천주교의 입장에서는 공격받을 일이나, 우리는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발언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가 망한 이유중의 하나는 사문난적이라 하여 성리학이 아닌 것을 인정하지 않은 분위기 즉,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아서 더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약이 존재하는 사회는 결코 발전할 수 없다!
지도자의 마음과 지도자의 능력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기본 명제를 우리는 정조와 다산을 통해 알수 있었다. 앞으로도 이와같은 지도자가 온누리 곳곳에서 나와 우리의 삶과 정신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었으면 한다.
다음 시간에는 제 2강 화성에 투영된 실학의 구체성에 관해 알아보겠다.
< 60년만에 돌려받은 문정왕후 어보 >
(강사님이 문정왕후어보반환에 관한 스토리를 이야기 해주셨는데, 기사의 문맥상 중간에 넣기가 어색하여, 기사말미에 실었다.)
얼마전 뉴스에서는 문정왕후의 어보(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용 도장)를 찾아온 기쁜 소식이 발표됬는데, 이 역사적 사건의 일등 공신은 헤문스님과 함께 바로 오산의 국회의원 안민석 의원이다. 이 기사의 주인공인 문정왕후는 각종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희대의 악녀로 자리잡았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명종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시작한 수렴청정이다. 이것 자체가 조선시대 모든 남성들을 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두번째 이유는 조선초기에 폐지된 승과를 부활시킨 일이다.
이또한, 앞서 설명했듯이 승유억불정책이 근본인 조선시대에 신하들의 등을 돌리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하지만, 이렇게 평가절하되있는 문정왕후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를 등용하기도 했는데, 이 두 승려는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운 인물들이다. 이것만 봐도 문정왕후는 사람보는 눈이 밝고, 베포가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정왕후 어보는 한국전쟁 중 미군에 의해 도난된 왕실 어보 47과 중 하나이다. 앞으로도 나머지 어보들을 모두 되찾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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