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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계산 또 하나의 전설 “장군바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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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OSTV | 작성일 | 2014.03.20 | 조회수 | 1564 |
| 여계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보면
매우 넓은 바위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장군바위 또는 여계바위이다.
[장군바위 상단]
여계산이라는 이름은 산의 형세가 닭의 벼슬처럼 생겼다 하여 여계산(如鷄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 여계산 이름에 대한 슬픈 전설이 또 하나 내려오고 있다. 그 내용은 예전에 여계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기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마을 원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여계는 이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계는 마을 원님과 함께 하는 주연에 참석하게 되었고, 주연에서 한 잔, 두 잔 술에 취한 여계와 원님은 함께 춤을 추게 되었다. 여계는 평소 사모하던 원님과 춤을 추다가 높은 바위 위까지 올라가게 되었고, 살아서는 둘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 여계는 그 높은 바위 위에서 원님을 끌어안고 춤을 추다가 바위 밑 낭떠러지 아래 늪으로 몸을 던져 원님과 함께 죽었다고 한다. 그 때 여계가 원님과 함께 올라갔던 바위를 “여계바위”라고 하고, 산의 이름을 여계산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그 여계바위가 조선조 선조(宣祖)때 무신 이괄(李适 1587~1624)이 무술을 연마하던 터라고 하여 장군바위라고도 불리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장군바위 측면] -------------------------------------------------------------------------------------------- 이괄 장군은 본관 고성(固城). 자 백규(白圭). 무과에 급제하여 태안군수를 역임하고, 1622년(광해군 14)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기 직전, 인조반정에 가담, 작전지휘를 맡아 반정을 성공하게 했다. 이괄은 후금(後金)과의 국경 분쟁이 잦자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副元帥)로 영변(寧邊)에 출진, 성책을 쌓고 국경 경비에 힘쓰다가, 1624년(인조 2) 아들 전()이 지식층과 사귀다가 공신들의 횡포로 인한 시정의 문란을 개탄한 것이 과장되어, 반역의 무고를 받고 영변 군영에 금부도사가 당도하자 무능하고 의심 많은 공신들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 난을 일으키게 된다. 이 때 이괄은 1만 2000의 군사를 거느리고 탁월한 작전으로 서울로 진격하자 인조는 공주(公州)로 피란하고, 이괄은 서울을 점령하고 흥안군(興安君) 제()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서울에 입성한 지 이틀 뒤 장만(張晩)의 관군에 참패, 이천(利川)으로 도망했으나 부하 장수 기익헌(奇益獻) 등에게 목이 잘리게 되어 이괄의 난은 평정되게 된다. [두산백과 참조] -------------------------------------------------------------------------------------------- 비록 난을 일으켜 세상을 어지럽게는 하였지만, 한 시절 무술을 연마하기 위하여 여계산을 찾아 수련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은 오산의 또 하나의 이야기 거리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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