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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인문학_꿈두레에서 만나다
작성자 OSTV 작성일 2015.06.22 조회수 1373

꿈두레도서관에서 진행 중인 길 위의 인문학이 오늘로 세 번째 시간입니다.

수강신청을 하고 일이 생겨서 두 번은 결석하고 오늘에야 참석을 했지요.

아, 메르스 때문에 2주 간 도서관의 모든 문화강좌와 행사가 취소되었기에 개강하고 한 달여만에 간 셈이네요.

 

 

오늘 강의는 정해득 한신대 한국사학과 교수의 정조의 화성건설과 오산이라는 제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정해득교수는 수원출신으로 초~대학까지를 수원과 수원 인근에서 다닌, 그야말로 이 지역색을 품고 있는 분 같네요.

수원 = 화성 = 정조 = 효의 연결고리가 생기게 된 배경을 위주로 강의를 해주었습니다.


유교사상의 중심인 충, 효를 생각해보면 정조의 현륭원을 세운 이야기, 화성을 조성한 이야기가 이해될 수 있는데요. 어떤 이유에서였건 정상적이지 않은 삶을 살았고 세자임에도 뒤주에서 굶어죽어야했던 아버지에게 효를 다하기 위해 노력했던 아들 정조를 생각하면 답이 나오는 것이지요.


임진왜란 때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던 것이나 인조의 삼전도 굴욕으로 왕의 권위, 왕실의 권위는 땅 위에 떨어질대로 떨어진 상황에서 숙종이 그 권위를 제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영조는 그것을 지키고 굳건하게 하였고요. 이것을 지켜나가야하는 상황에서 아들이 미치광이가 되어 사람을 죽이며 왕이 될 자격을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아버지-아들을 떠나서 왕권을 지키기 위한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왕명으로 죽이게 되면 아들 사도세자는 죄인의 신분이 되어버리며 역사의 기록에도 그렇게 남기 때문에 자결을 명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굶어죽게 만들었습니다. 이 때의 기록은 훗날 세손인 정조가 영조의 붕어 직전 승정원일기에서 세초해달라고 요청하고 이에 영조가 응하여 삭제되어 버렸기에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게 되었지요.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과정 등등의 사실들이요.

 

 

오늘 강의를 들으면서

그동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도세자의 비운

아비를 그렇게 잃을 수밖에 없었던 세손 이산

남편을 아들을 잃은 헤경궁 홍씨와 영빈이씨에만 집중했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아버지 영조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거든요.


지금까지 저는 사도세자는 당쟁의 희생양이 된 탓이 크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사도세자의 패악 자체에 가장 큰 문제가 있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매 회 다른 주제로 이루어지는 길 위의 인문학, 다음 시간이 더욱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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