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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장군묘 방문기 | 한산의 무너짐 그리고 원균의 사라짐
작성자 OSTV 작성일 2014.09.02 조회수 2729

이번 여름 개봉한 영화 <명량>이 누적관객 1700만을 돌파한 가운데,

영화에 등장한 인물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관심의 중심에 있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멋진 리더의 대명사 이순신장군일테고,

기타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관심 또한 높지요.

재미있는 사실은 이순신의 아들 역을 맡은 배우의 이름이 "권율"이네요.^^

여행을 다녀올 때,

경부고속도로가 막히면 송탄IC로 들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진위방면으로 올라오다보면, 이정표에 원균장군묘가 있더라고요.

예전부터 한 번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다가, 지난 주말에야 다녀왔어요.

영화 <명량>을 보고 감상문까지 쓴 아들을 위해서랄까요??ㅋㅋ

오산에서 무척 가까운데요.

시청으로부터 13km 떨어져있으니 굉장히 가깝지요?

여러분은 "원균"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어떤가요?

혹시 저처럼 비열하고 권모술수에 능하며

리더답지 못한 얼굴이 떠오르시지는 않는지 모르겠어요.

어릴 때 읽은 위인전이나 만화 등에서 이순신은 영웅이며,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한 "나쁜 놈"으로 본 것 때문일까요?

하지만, 이번에 이 장소를 방문한 후에 원균장군에 대한 자료를 모으던 중,

원균에 대한 해석도 다양해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순신을 모략해서 어려움에 빠트리고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인격이 덜 된 "위인"이라는 평과

(통제사 부임 이전의 행적을 보면) 명령을 잘 따르는 장군으로

괜찮았던 점도 있다는 평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원균은 공보다는 과가 너무 크지요.

임진왜란, 정유재란 중 조선수군이 유일한 패전을 한 것이 바로

원균이 이끈 칠천량해전이었고,

140 여 척의 배를 잃어 조선 수군이 붕괴되다시피 되었습니다.

그 덕에 감옥에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게 되었으니,

이순신의 입장에서 보면 하늘이 내린 기회인지도 모르겠어요.

<원균장군묘>

평택시 도일동 일대는 원주 원씨의 집성촌 중 하나랍니다.

원균장군도 이 곳에서 태어났고요.

현재까지도 원씨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원균장군묘로 갔습니다.

방문객을 위한 주차장도 마련되어 있고, 옆에 건물도 하나 있습니다.

慕先齋라고 쓰여진 곳인데,

어떤 용도의 건물인지 안내가 없어서 궁금했는데요.

집에 온 후 검색해보니,

원주원씨의 제각으로 사용되는 건물이라고 합니다.

이 건물이 마주보는 곳에 내리저수지가 있고,

저수지 뒤로 장군묘가 보입니다.

선조 36년에 권율, 이순신과 함께 宣武 1등 공신에 추록되었으며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릉군

(崇錄大夫議政府左讚成兼判義禁府事原陵君)이 추증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님 말씀) 하는데,

어쩐지 입구에 홍살문이 있는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았거든요.

사진의 오른쪽 홍살문을 통과하면 원균장군의 묘소로 들어갈 수 있고요.

왼쪽의 오르막길로 2-3분 정도 걸어가면 원균장군 사당이 있습니다.

원군장균묘

경기도 기념물 제57호

소재지: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산82

원균(1540-1597)장군의 자는 평중으로 조선 선조때의 무신이다.

무과를 급제한 후 선전관을 거쳐 조산만호 부령부사를 지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처음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장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왜선 30 여 척을 무찔렀다.

그 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등 여러 차례에 걸친 크고 작은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선조 30년(1597)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선조 36년(1603)에 권율, 이순신과 함께 선무 1등 공신에 추록되었다.

선조가 이순신을 심히 견제하였으므로 이순신장군이 노량에서 죽지 않았다면

아마 선조의 손에 죽었을 것이란 말도 있던데,

원균은 무척 아꼈나봅니다.

묘소 아래를 보니 1605년 선주가 보낸 제문을 한글로 번역한 비문이 있거든요.

원균의 어떤 점이 선조를 "일편단심"으로 만들었을까요?

묘소 옆에 자리한 문인석...

세월이 얼마나 흐르고 흘렀는지를 몸소 보여주고 있네요.

묘소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내리 저수지가 보이고

풍수지리를 잘 모르지만, 왠지 명당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사진에 담을 수는 없는 몸과 눈으로 직접 봐야 알 수 있는 거에요~~ ^^;;

위의 사진을 보면 왼쪽 아랫 부분으로 작은 비석과 작은 봉분이 보이시죠?

바로 "애마총"이라고 불리는 무덤인데요.

원균의 애마가 묻힌 무덤인데, 사연이 있답니다.

원균이 수군통제사가 되기 전에는

부산에 주둔해 있는 왜군을 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다가

막상 통제사가 되어 부임해보니 할 수가 없었지요.

적을 치라는 선조의 명을 어기고

이리저리 시간만 끌고 도망다니던 원균은

권율에의해 태장을 맞고난 후에 공격에 나섰습니다.

부산에서 후퇴해 거제도 옆 작은섬 칠천도를 지나던 중

일본수군에 야습을 당하게 되고,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도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고성과 통영 부근의 춘원포에서 왜군의 칼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그가 죽자 그의 애마가 주인의 곰방대와 신발을 물고,

여기까지 왔으나 지친 나머지 끝내 그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묻고 애마총으로 만들었고요.

원균의 시신은 찾을 수가 없어서

곰방대와 신발만으로 가묘를 쓴 것이라고 해요.

가묘라니... 충격이었네요.

저는 묘를 다녀온 후에야 이러한 사연을 알았거든요.

지나가는 길에 들른 준비없는 방문이어서 몰랐네요.

그렇다면

원균의 진짜 묘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정확하지는 않으나,

국도 77호선 변에 원균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아직도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가운데

진묘로 추정되는 봉분은 통영시 안정국가산업단지에서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로 이어지는 국도 77호선 주변

야산 20여m 지점에 완만하게 오른 자갈 흙더미로 남아있다.

지금은 흔적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이다.


주변마을 주민 사이에 '엉규이(원균의 지역적 발음으로 추정) 무덤'

또는 '목 없는 장군묘'로 불려 온 이 봉분은 각종 문헌과 구전을 토대로

원균의 묘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부산일보>2014.8.28. 김민진기자)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40828000143)

묘소를 내려와서 언덕을 넘어갑니다.

언덕 중간 즈음에 화장실 건물이 있는데,

그 건물에 조그마한 안내소가 있었습니다.

사진 속의 옥색 문, 보이시죠?

안내소라는 아무런 "안내"가 없어서 몰랐는데,

어떤 곳인가 궁금해서 열어보니 이렇게... ^^;;

리플렛을 챙겨서 사당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언덕 정상에 제 키보다 큰 "깻잎나무"를 보며 놀랄 때,

사당이 딱 보였습니다.

사당의 원래 위치는 묘역 옆이었는데,

물이 나고 낡아서 이 위치로 옮겨온 것이라고 합니다.

<사당에서 내려가는 길>

지금에 이러러서는 칠천량해전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부르지만,

옛날에는 "한산의 무너짐" 혹은 "한산의 패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 "무너짐"이라는 단어가 참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조선의 수군이 배설이 도망치며 끌고간

단 12척만을 남기고 모두 전멸한 것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겁먹어 도망치다가 거의 몰살당한 것이기에...

이 패배가 너무나 충격이어서

이를 두고 더이상의 이름을 붙이기에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짐작을 해봅니다.

명장이든 패장이든 죽은 자는 말이 없으며

오로지 후세가 평가하는대로 받을 뿐이지요.

후세에 길이 남을 선인이 되든

후세에 길이 남을 악인이 되든

이름을 남기기에 급급해하지 말고

주변을 돌아보고 사랑하며 섬기며 살다보면

저절로 이름이 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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